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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마스터 피스, <아이리시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가 꺼내든 명언이다.

봉 감독이 어릴 적 영화를 공부할 당시, 가슴에 새겼던 마틴 스콜세이지의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은 활짝 웃어보이며 박수를 쳤고, 식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았을 때, 필자는 그의 이번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 평범한 고기트럭 운전사였던 프랭크가 우연한 기회에 범죄조직에 합류하며 트럭조합위원장 지미 호파를 도와 거물로 거듭나는 이야기.

 

*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 조 페시까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 러닝타임은 무려, 209분이다. 영화를 보기 전 만반의 준비가 꼭 필요하다.

 

*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인, 트럭운송조합 위원장 '지미 호파 실종사건'을 바탕으로 한 범죄드라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타 범죄물들이 정면으로 내세웠던 드라마틱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킬러의 화려한 암살기술, 목표물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하고 탄탄한 작전, 긴장감 넘치는 범죄장면들. 아무것도 없다. 거슬린다 싶으면 뻥 쏴서 죽이고, 장애물이다 싶으면 빵 폭탄 터트리고 끝. 말로 하는 정치질의 비중이 더 높은 것은 덤. 그래서 이 영화는 재미가 없다며 심심찮게 평점테러를 당한다.

 필자 또한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면서 자리를 두 번이나 옮겼다. 물론 어디까지나, 엉덩이가 배겨서였다.


내맘대로 뽑은 명장면 #1.

* 지미와 프로의 유치한 말싸움과, 그에 이어지는 몸싸움 장면

 

* 지미는 결단력이 있지만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인물. 위원장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프로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임에도 그는 결국 수준 이하의 말싸움을 벌인다. 특히 먼저 사과하면 자신도 사과하겠다는 말에서는 약간의 찌질함이 느껴질 정도.

 

* 지미는 계속해서 위원장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다른 이들의 사업장 대출까지 막아버리며 힘을 떨치려 갖은 애를 쓴다. 하지만 그가 감옥에 다녀온 사이, 이미 세는 많이 기운 상태. 낡고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언제나 안타깝다.

 

 

내맘대로 뽑은 명장면 #2. 

* 러셀의 지시를 받은 프랭크가 지미를 살해하는 장면.

 

* 영화는 이 장면을 아주 절제된 시선으로 다룬다. 인물로부터 직접 드러나는 것은 프랭크의 착잡한 표정과 더듬거리는 말투가 전부. 실세인 러셀의 지시를 받는 순간부터 지미를 만나 살해하는 순간까지의 장면은 그림을 감상하듯 프랭크의 동선을 따라 그려진다. 그만큼 오랜시간 동거동락한 지미를 총으로 쏴 죽여야하는 그의 고뇌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

 

* 이 장면은 프랭크가 러셀을 처음 만났을 때 회상했던 장면과 겹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로 참전했던 인물. 러셀이 프랭크를 마음에 들어했던 이유는 철저히 명령에 따르는 프랭크의 면모 때문이었다.

 

 

내맘대로 뽑은 명장면 #3.

* 프랭크가 딸이 일하는 창구를 찾아갔다가 철저히 외면당하는 장면

 

* 이 영화에서 비중이 높은 여성인물을 꼽아보자면, 프랭크의 딸 페기다. 페기는 어린시절 프랭크가 자신을 밀친 과일장수를 두들겨 패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아버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인물. 프랭크가 저지른 일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마다 둘의 간극은 벌어지고, 삼촌처럼 따르던 지미를 아빠가 살해했다는 사실을 페기가 은연중에 깨달았을 때에는 완전한 평행선을 이룬다.


+이에 더하여 1.

*러셀과 토니, 지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프랭크의 모습은 참 안타깝다. 가장 괴로운 것은 중간에 낀 사람인데, 프랭크가 그렇다. 이 장면은 프랭크가 지미를 설득하는 장면. 지미를 생각하는 그의 진실된 마음은 본인이 주인공인 감사 만찬회에서도 끊임없이 러셀의 눈치를 살피며 즐기지 못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에 더하여 2.

*영원한 것만 같던 이들도 결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치장 신세가 된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엔, 프랭크만 남았다. 백발의 노인이 된 프랭크는 관절염으로 목발을 짚고 다니며, 가족에게는 외면당하고, 신부에게는 고해성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 그는 헤진 사진을 보며 과거를 떠올린다. 인생무상. 스러져가는 인생.

 

*영화는 새로운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마치 명찰처럼 그가 몇년도에,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자막으로 달아준다. 한때 좀 잘나갔던 이들도 결국은 이런저런 죽음을 맞이할 뿐.


여담>

+ 영화는 세 가지 시간대가 함께 굴러간다. 거기다 등장하는 인물도 아주 많다. 하지만 큰 혼란은 없다. 다시 보면 완벽하게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볼 엄두가 안 나는 러닝타임 208분.

 

+ 1900년대 중후반 미국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있다면 영화 관람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까진 어떻게 따라갔는데,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마피아나 범죄 조직의 생태에도 다소 무지한 필자에게는 조금 무리가 있는 영화 선택이었다.

 

++ 평론가들은 전부 9점 이상을 주며 마스터피스라고 극찬하더라. 거기에 편승하고 싶지만, 호흡이 빠른 영화들을 주로 봐왔던 필자로서는 이게 그 정도인가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집중력이 흐려질 정도로 느리다. 하지만 그만큼 묵직한 무언가를 툭 떨구는 느낌적인 느낌. 마스터피스의 느낌이란 이런 건가보다.